시위계획

시위계획

시위는 이른바 ‘사직동계’, ‘통동계’, ‘공청-천도교계’ 세 방향에서 계획되었다. 이밖에도 자연발생적으로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져 나왔다.

1) 사직동계: 주동 학생들이 자주 모인 연희전문 학생 이석훈의 하숙이 사직동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40여명은 5월20일 충정로 박하균(연희전문 문과 2년)의 하숙에 모여 순종 인산에 맞춰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준비책임자로 이병립(연희전문 문과 2년) 이선호(중앙고보 5년) 박두종(YMCA 영어과) 이천진(경성제대 예과 1년)을 선출하였으며 자금 조달은 박하균과 박두종에게 일임하였다. 1925년 창립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사회주의를 공부하는 단체로, 이중 이병립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조선공산당과 연결된다.

이들은 6월 5일 서대문 관내 애기능(현 북아현동 중앙여고 구내) 소나무 숲 속에 모여서 태극기 200장과 ‘조선독립만세기’ 라고 쓴 깃발 30장을 준비하였다. 이병립이 초안한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격문’을 읽어보고 모두 찬성하여 동지인 장규창에게서 빌려온 명함인쇄기와 김규봉(연희전문)이 서대문 밖 평화상점에서 구입해 온 백지를 가지고 사직동 이석훈의 하숙에서 주동자들이 모여 시위날 아침까지 1만여 매의 격문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격문’과 태극기는 이선호가 중앙고보 권태성 류면희, 연희전문 권오상 홍명식 박한복 등에게 교부하였다. 박두종은 김낙환, 기독청년회 영어과 유원식, 근화학교 김정자 등에게 나눠 주었다. 이선호로부터 태극기 30장과 ‘격문’ 200매를 교부받은 류면희(4년)는 동기생인 임종업 이현상 등에게 나눠주었다.

2) 통동계: 박용규(중앙고보 5년)와 김재문(중동학교 특과3년)이 하숙하던 통인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5월16일 박용규와 김재문 황정환(중동학교 특과3년) 곽대형(중동학교 특과2년) 이동환(중앙고보5년) 등 주동학생 5명은 가회동 취운정 인근에 사는 친구 문인근(중앙고보 5년)의 하숙에 모여 출상 때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동지규합을 위해 일요일인 5월 23일 혜화문 밖 성북동 삼선평에서 시내 각 학교 대항 축구시합이 있다고 위장 고지하고 평소 민족의식이 있는 학생들에게 은밀히 알렸다.

5월 23일 운동복 차림으로 삼선평에 모인 50여명에게 김재문과 황정환이 모임 취지를 설명하고, 만세 시위를 제의하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찬성했으나 이동환과 황정환은 ‘만세 같은 소극적인 행동은 그만두고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본정(현 명동) 등에 폭탄을 던지든지 아니면 총독부 같은 침략본부를 폭파하자’고 했으나 동조자가 없자 ‘용기 없는 사람은 물러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한다.

다음날 아침 주동학생 5명은 통인동 하숙집에 모여 ‘폭파는 현 정세로 보아 실현성이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독립만세투쟁을 결의했다. 5월26일 주동자들은 통인동 하숙집에서 빌린 등사기로 30일까지 약 3만매의 ‘격문’을 인쇄하였다. 이들은 ‘격문’에 ‘조선민족대표 김성수, 최남선, 최린’이라고 썼다. 이들은 군중의 호응을 크게 얻기 위해 사전 양해 없이 김성수 등 이름을 썼다.

박용규는 인쇄한 ‘격문’을 조홍제(중앙고보 4년·효성그룹 창업주) 이상민(휘문고보) 등에게, 이동환은 최제민(중앙고보 4년) 등에게 교부하였다. 이들은 6월8일 지방의 각 학교에 격문을 우송하고, 서울의 학교들에는 학교 우편함에 넣었다.

3) 공청-천도교계: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이 중심이 된 노총과 천도교 구파인 박내원 등 인쇄공조합원들로 구성된 청년들이 주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사전에 발각됐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 경찰은 학생들이 일으킨 ‘6・10만세운동’과 구별하여 ‘6월 사건’(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불렸다.

조선공산당 상해임시부는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당초 기획했던 노동절(5월1일) 대대적 시위 대신 6․10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당면과제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정치 이념을 초월한 통일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일정 부분 중국의 국공합작이 영향을 미쳤다. 1926년 초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 박래원 등과 연대해 시위를 꾸몄다. 권오설은 자금조달, 천도교는 인쇄 격문배포 등을 담당하기로 분담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부분적으로 미수에 그쳤다. 중국 위폐범을 추적하던 종로서는 6월4일 도렴동 한 주택을 수색하던 중 위폐와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적힌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고문’ 1장을 발견했다. 집주인으로부터 평북 선천의 금광업자 안정식으로부터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체포된 안정식은 “권오설이 군자금 5000원을 요청할 때 2매를 주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경찰은 천도교 손재기의 집에서 격문 5만여 매와 전단을 압수하고, 박래원 민창식 손재기 이용재 백명천 이지탁 등을 체포하였다. 권오설은 6월7일 장사동 은신처에서 붙잡혔다.

상해로부터 온 ‘격고문’ 5000여 매도 서울역에서 압수당했다. 이 사건으로 제2차 조선공산당은 와해됐다. 1928년 2월 권오설은 징역형 5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0년 4월 17일 순국했다. 그는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고 역사의 심판을 논하다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제는 고문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열지 못하게 철관에다 시신을 넣고 납땜을 했다.

권오설 선생 철관 (경북 독립운동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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