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급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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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철통같은 사전·사후 탄압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규모도 작았다. 또 운동은 계획단계부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계가 같이 주도했던 민족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극심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분열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세력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첫 반향은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에서 일어났다. 1926년 7월 16일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김규식, 송병조, 이유필 등이 삼일당에서 6․10만세운동에 대한 연설회가 열었다. 이 연설회에는 상해 거주 교민 200여명 모였다. 공산주의자인 김단야는 경과보고에서 6․10만세운동이 천도교와 노동계의 조직과 통일전선을 이루어 추진하였다면서 적화운동이 아닌 순연한 민족적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산 안창호는 6․10만세운동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주의와 이념을 초월하는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그 이전에도 상해에서 독립운동세력 간에 전선통일 노력이 있긴 했다. 1926년 5월 ‘독립운동촉진회’가 발기됐지만 이견과 재정문제로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6․10만세운동 소식으로 인해 민족대당촉성운동이 급진전한 것이다.

민족대당촉성운동의 기치는 국내외로 퍼져 나갔다.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만주에서도 독립군 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생겼다. 민족유일당 운동이 그것이다.

또 국내 독립세력의 통합 계기가 됐다. 1927년2월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이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신간회를 만들었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학생독립운동을 일신시켰다. 3․1운동 때 학생의 위상은 전위역할을 담당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3․1운동 이후 조선학생회, 조선학생대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독자적 학생운동조직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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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울 중심이었다.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이 독자적 운동 주체로 부상하면서 학생운동조직이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각처에 생겨나고, 후일 광주학생운동의 모태가 된 성진회가 1926년 11월 성립됐다. 1927~8년의 비밀결사, 독서회, 맹휴 등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학생운동은 국내 독립운동의 중심적 위치로 부상해 갔다.

6ㆍ10만세운동은 해외에서도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의 신문 잡지에 ‘6ㆍ10만세운동’에 대한 기사가 적지 않게 실렸다. 당시 중국 문단의 대표적 문인 중 한 사람인 주지칭 교수(칭화대)은 ‘패현’이란 필명으로 1926년 7월 ‘신보부간(晨報副刊)’ 제58기(제58호)에 장편시 ‘조선의 밤울음(朝鮮的夜哭)’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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