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전야

1926년 순종의 승하는 국민들에게 망국의 설움을 안겨준 계기가 되어 한민족의 반일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전국에서 30만 명의 추모 인파가 서울로 운집했고 창덕궁 앞엔 연일 호곡소리가 높았다. 추모 인파가 이렇게 많아진 데는 5월13일부터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도 한몫 했다.

1) 일제 경계강화

일제는 긴장했다. 1919년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을 경험한 일본 총독부는 일인 주치의로부터 수시로 순종의 병세를 보고받으면서 철저하게 대비했다. 순종이 4월25일 승하하자 미쓰야 경무국장은 안도 경찰부장에게 요시찰인물과 사상단체, 종교단체, 요주의 학교 동정을 집중 단속하도록 지시했다.

6월 7일 오전 일제는 용산의 일제 조선군사령부 병력 약 2,500명을 무장시켜 서울 시내 곳곳에서 행군시위를 벌이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일제는 평양, 함흥, 청진 나남과 일본 도쿄의 육해군 5, 000여명을 서울로 이동시켰으며 부산과 인천에는 제2함대를 대기시켰다.
전날인 9일 오전 경찰은 학생중심의 시위계획이 암암리에 추진되고 있음을 탐지하고서는 학생모임의 중심장소인 견지동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 여러 장소를 수색하였다.

2) 전야

순종이 4월 25일 승하하자 전국 도시들마다 가게 문을 닫고 애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공립학교는 적극적으로 추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립학교들은 학생과 학교가 수업을 중지하고 추도했다. 중앙고보와 보성고보는 상복을 처음 입는 성복일인 5월1일까지 휴학하고 근신했다.

더 적극적인 움직임도 나타났다. 4월 28일 오후 1시 10분 창덕궁 서쪽 금호문 앞에서 열혈청년인 송학선은 차를 타고 조문하러 오던 국수회 지부장 타카야마와 경성부협의회 의원 이케다를 사이토 총독으로 잘못 알고 칼로 찔러 타카야마를 숨지게했다. 송학선은 이듬해 사형을 당했다.

6월2일 조선일보 기자 홍순정과 김동헌 등이 만세를 계획하다 붙잡혔고, 중국 상해에서 ‘우리 모듬단’을 조직해 활동하던 박영호 김응렬이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다가 체포당했다. 또 병인의용대의 고준택 김석룡 이영선 김광선 등이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고관을 죽이기 위해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중국 상선 순천호를 타고 출발하였다가 중국 황포탄 하류에서 일본 수상경찰의 수색을 받아 6월1일 체포당했다. 병인의용대는 1925년 말 임시정부를 지지옹호하고 일제 주구배 숙청, 밀정 엄단제거, 적의 주요인물 사살, 적의 주요시설 파괴응징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어져 실제로 밀정들을 암살하고 상해 일본 총영사관을 폭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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